드라마 × 공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 같은 집, 같은 음악, 그리고 아주 다른 마음의 속도

view0920-1 2025. 8. 3. 15:50

로맨틱 코미디의 탈을 쓴 ‘관계 실험 드라마’

OST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실제 커플로 이어져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逃げるは恥だが役に立つ)’는 제목만큼이나 파격적인 소재로 시청자의 호기심을 끌었다. 정규직 취업에 실패한 여주인공 ‘모리야마 미쿠리’가 ‘고용계약 결혼’을 통해 독신주의자 회사원 ‘츠자키 히라마사’의 집에 가사도우미 겸 아내로 들어가게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랑이 아닌 ‘노동 계약’으로 정리되는 이 설정은 현실적인 동시에 매우 신선했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유는 단지 로맨틱 코미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반드시 열정에서 시작되는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던진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욕망, 관계에 대한 합의와 경계 등 복잡한 요소들을 담아내면서도, 웃음과 설렘을 잃지 않는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적인 로맨스였다. 그리고 이 실험을 성공적으로 끌고 간 두 가지 축이 있다. 바로 ‘집’이라는 공간과, 매 회 마지막에 흐르며 시청자의 심장을 간질이던 그 음악, 호시노 겐의 ‘코이(恋)’였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서 고용계약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집

‘집’이라는 계약 공간, 일상이 관계로 바뀌는 무대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가장 핵심적인 무대는 단연 주인공 히라마사의 집이다. 도시 외곽의 평범한 아파트. 처음엔 계약서 한 장으로 묶인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이 집에서 시작된다. 가사도우미로 출근하듯 집을 드나들던 미쿠리는, 어느새 자신의 자리처럼 편하게 앉고 걷고 잠든다. 그리고 히라마사는 처음엔 엄격하게 지키던 사적 영역의 경계를 서서히 허문다. 이 공간은 두 사람의 감정 선이 어떻게 확장되고 좁혀지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주요 장치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식탁에서 마주 보는 거리감, 함께 앉는 소파의 간격, 혹은 혼자 자던 침대에서 나란히 누웠을 때의 미묘한 긴장감 등은 모두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표현 가능한 섬세한 감정의 흐름이다. 이 드라마는 ‘사랑이 발생하는 장소’로서 집을 재해석한다. 출근과 퇴근이 분리된 연애가 아니라, 매일 아침과 밤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서 생겨나는 정서적 교감이 진짜 관계의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계약’이라는 인위적 구조 속에서도, 인간은 진심을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작은 부엌, 정리된 거실, 침실의 조명 등 공간은 침묵 대신 감정을 말하는 중요한 장면이 된다.

 

 

 

‘코이(恋)’가 흐를 때, 감정은 설명보다 먼저 전해진다

이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유독 깊게 각인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엔딩곡 호시노 겐의 ‘코이(恋)’였다. 단순한 OST가 아니라, 이 곡은 드라마 자체의 상징이 되었다. 밝고 리드미컬한 멜로디 위에 약간은 수줍고 어딘가 어설픈 감정을 담은 가사는, 히라마사와 미쿠리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특히 매회 마지막에 등장하는 ‘코이댄스’는 유쾌함과 로맨스를 동시에 전달하며, 드라마가 담고 있는 진지한 주제를 무겁지 않게 마무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곡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감정적으로 폭발시키지 않는다. 대신 살짝 두근거리고, 조심스러운 설렘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호시노 겐의 목소리 또한 그런 감정을 자연스럽게 실어 나른다. 마치 히라마사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는 듯한 그 담백한 음색은, 시청자에게 "말은 못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진짜야"라는 메시지를 음악으로 전한다. 실제로 ‘코이’는 발매 직후 일본 전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코이댄스’는 전 연령층이 따라 출 수 있을 만큼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서 음악은 캐릭터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언어이자, 시청자와 드라마를 이어주는 정서적 다리 역할을 했다.

 

 

사랑의 정의를 다시 묻는 드라마, 공간과 음악이 만든 설득력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새롭게 정의하고, 관계라는 개념을 다시 묻는다. 계약부터 시작된 사랑, 생활을 함께 하며 만들어지는 신뢰,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까지 — 드라마는 이 모든 것을 가볍고도 진지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집’이라는 공간과 ‘코이’라는 음악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넓은 세상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오히려 더 깊은 감정선을 가능하게 했다. 방 하나, 거실 하나, 식탁 하나로 이어진 구조는 시청자에게도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음악 또한 드라마의 전체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마지막에는 감정을 위트와 따뜻함으로 감싸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결국 이 작품은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드라마 속 음악과 공간 산책 시리즈에서 이 작품을 다룬 이유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단순한 장면의 나열이 아니라, 공간의 체온과 음악의 박자를 통해 진심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결국, 진심이 머무는 가장 작은 공간이 사랑이 시작되는 곳임을 보여준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