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공간

[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③<응답하라 1988> – 골목과 대문, 공동체를 품은 기억의 공간

view0920-1 2025. 7. 1. 11:58

따뜻했던 기억은 언제나 ‘공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있다면 그 속에 깃든 공기, 소리, 색감, 냄새 같은 것들이 감정을 먼저 자극한다.

<응답하라 1988>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공간의 힘 덕분이었다. 쌍문동 골목길과 집 앞 대문, 그 앞에 놓인 작은 평상과 담벼락은 단순한 드라마 세트가 아니라 감정을 저장하고 관계를 잇는 ‘기억의 장치’였다. 특히 이 드라마는 특정 인물의 서사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세대의 정서를 포용한 점에서 공간이 전달하는 감정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아이들의 우정, 부모들의 고단함, 형제간의 갈등, 그리고 이웃 간의 정은 모두 골목이라는 공유된 공간 안에서 켜켜이 쌓였다.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한때 우리가 살았던, 혹은 살고 싶었던 공동체의 풍경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공간이 있었다는 점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쌍문동 골목 – 연결과 위로의 상징

쌍문동 골목은 <응답하라 1988>의 진짜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골목은 단순히 여러 집이 모여 있는 생활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이 흐르고 관계가 자라는 사회적 유기체처럼 그려진다. 덕선, 택이, 정환, 선우, 동룡이가 뛰어놀던 좁은 골목길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고, 부모들에게는 이웃과 삶을 나누는 마당이었다. 공간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동선을 겹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대화와 사건이 발생한다. 특히 비좁은 골목은 갈등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게 만든다. 숨을 곳 없는 좁은 길이었기에 거짓말도, 오해도 쉽게 드러났다.
또한 이 골목은 정서적으로 안전한 공간이었다. 하루의 피곤이 묻어 있는 퇴근길, 누군가의 울음이 들려오는 밤, 그리고 다 같이 모여 앉아 수박을 나누던 여름날. 이 골목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품어주었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마음은 훨씬 넓게 느껴졌다. 골목은 물리적인 장소를 넘어 ‘정서적 고향’으로 기능하며,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시청자는 그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과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대문 – 경계이자 연결의 문턱

보통 대문은 집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에서 대문은 ‘개인의 울타리’라기보다 ‘공동체의 통로’로 묘사된다. 드라마 속 각 가정의 대문은 대부분 철제 접이식이거나 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형태다. 그런데 그 문은 항상 반쯤 열려 있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가진다. 아이들은 서로의 집에 초대받지 않아도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 모습은 ‘지금은 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문이라는 것은 보통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문은 ‘관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문이 닫혀 있어도 마음은 열려 있었고, 문이 열려 있는 한 누군가를 반기겠다는 뜻이 전해졌다. 대문 앞 평상에 앉아 이웃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아이들이 서로의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 그리고 첫사랑의 편지가 몰래 꽂혀 있던 장면까지. 이 모든 건 대문이라는 ‘생활의 입구’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처럼 대문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품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 문턱은 단절이 아니라 소통의 출입구였고, 지금의 세대가 그리워하는 ‘연결’의 감정을 자극하는 매개체였다.

 

 

공간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응답하라 1988>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감정이 살아 있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다. 골목과 대문은 단지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공동체적 삶의 구조를 되새기게 만든다. 드라마 속 사건들이 특별하지 않았음에도 큰 울림을 준 이유는, 그 안에 녹아든 공간적 서술 때문이다. 누군가 골목에서 울고 있으면 그 울음은 담을 넘어 옆집에 전해졌고, 대문 앞에 누가 서성이는 장면은 그 사람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이런 공간을 통해 복잡한 설명 없이도 감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했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감각, 그 안에 깃든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이 만드는 이야기의 흐름. 결국 <응답하라 1988>은 ‘장소는 곧 사람이고 감정이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골목은 아파트로, 대문은 디지털 초인종으로 바뀌었지만, 그 공간이 품고 있던 온기는 시청자의 가슴에 남았다. 이 드라마는 공간이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를 기억하는 유기적 구조임을 증명했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은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 사회적 기록물로도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