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⑥<그 해 우리는> – 공간에 스민 감정, 어긋난 시선이 머물던 자리
스쳐간 공간에 남겨진 감정의 잔상
<그 해 우리는>은 감정의 결이 고운 드라마다. 큰 사건 없이도 여운이 남는 이유는, 드라마를 보는 동안 최웅과 국연수가 머물던 장소들이 시청자로 하여금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주요 무대는 화려하지 않다. 낡은 학교 교실, 좁은 골목길, 책상에 물감이 묻어 있는 스튜디오, 좁지만 따뜻한 작업실. 이 모든 장소는 극적 장치 없이도 인물의 감정과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특히 이 드라마는 ‘재회’와 ‘시간의 흐름’을 다루기에,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의 표면으로 작용한다. 인물들이 돌아온 공간은 같은 장소이지만, 감정은 달라져 있다.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그 해 우리는>만의 정적이고 섬세한 공간 연출이다. 시청자는 주인공들이 ‘예전 그 자리’에 다시 앉거나 서 있을 때, 대사 없이도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공간이 감정의 압축이자, 시간의 인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골목 – 찬란했던 어긋남의 시작
고등학교 시절을 담은 교실과 복도, 운동장은 주인공 연수와 웅의 첫 인연이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설렘과 동시에 어긋남이 쌓인 공간이기도 하다. 교실 안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경쟁하며, 엇갈린 시선을 주고받는다. 특히 카메라 앞에서의 어색한 대화, 같은 책상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품고 앉아 있던 장면은 공간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밀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자주 오가던 좁은 골목은, 공간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멀어진 거리감을 상징한다. 비 오는 날 서로를 피한 채 지나치던 골목, 몇 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걷게 되는 골목. <그 해 우리는>은 이렇게 반복되는 공간 속에서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시각화한다. 과거의 장소로 돌아오는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감정의 되짚기와 감정의 재배치라는 점에서 공간의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작업실과 스튜디오 – 감정을 견디는 공간
성인이 된 웅의 작업실은 그가 감정을 피하고 숨는 공간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과 정적인 조명, 그리고 바깥을 등진 채 앉은 그의 모습은 이 공간이 외부와의 단절이자 내면에 머무는 장소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연수가 찾아왔을 때, 작업실의 공기는 곧장 긴장감으로 채워진다. 넓지 않은 공간, 멀지 않은 거리. 그러나 말은 쉽게 닿지 않는다.
반면 연수가 일하는 회사의 회의실과 촬영 공간은 구조적으로 ‘거리’가 강조되는 공간이다. 카메라 너머로 누군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피사체와 피사자 사이에는 늘 프레임이 있다. 이 구조는 감정의 왜곡, 의도된 거리감을 상징하며, 두 사람 사이의 소통 부재를 강화시킨다. 결국 카메라 밖의 현실에서 다시 마주할 때, 그들은 온전히 말이 아닌 공간의 공기를 통해 감정을 교환하게 된다. 시청자는 그들이 함께 앉아 있는 시간보다, 서로 어긋나 있는 장면에서 더 큰 감정의 떨림을 느끼게 된다.
웅과 연수의 공간은 감정의 재회보다 앞서 있었다
<그 해 우리는>에서 인물의 감정 변화는 대사보다도 공간이 먼저 반응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공간에 깃든 감정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특히 두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지 않고, 시간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 서 있는 장면들은 ‘감정이 스쳐간 자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공간은 그들의 첫 만남부터 이별, 재회까지 감정을 보관하고 있다가, 다시 만난 순간 꺼내놓는다.
감정을 확인하려 할 때, 공간은 침묵으로 그들을 맞이한다. 아무리 말이 닿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감정이 전달되기도 한다. <그 해 우리는>은 시끄러운 감정의 분출 없이, 정적인 공간의 연출로 감정의 깊이와 거리, 무게를 표현한다. 시청자는 그 공간이 반복될수록 더 많은 것을 읽게 되고, 결국 감정을 따라가지 않아도 공간만 보아도 인물의 상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게 바로 <그 해 우리는>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그 공간에 이입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