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⑦<도깨비> – 저택과 바닷가, 시간을 품은 불멸의 공간
시간의 멈춤, 공간이 감정을 보관하는 방식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는 죽음을 다루지만 슬프지 않고, 시간을 이야기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드라마다. 그 중심엔 ‘공간’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공간은 살아 움직이는 감정의 저장소이며, 영원과 순간 사이를 이어주는 물리적 통로다. 주인공 김신은 천 년을 살아온 불멸의 존재이며, 그의 저택과 주변 공간들은 그 긴 시간 동안 감정을 흡수하고, 기억을 보관하며, 결국 그가 다시 인간적인 감정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도깨비의 저택, 저승사자의 집, 캐나다 퀘벡의 거리, 바닷가 절벽은 각각의 감정이 상징화된 장소이며, 인물 간의 관계 변화에 따라 공간의 느낌도 달라진다.
이 드라마는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 곡선을 따라 반응하는 유기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고요한 집안의 조명, 조용히 눈 내리는 거리, 빛이 비치는 절벽 끝—이 모든 장면은 말보다 강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기억의 재현이자, 영혼의 머무름이기도 하다.
저택 – 불멸의 고독이 쌓여 있는 공간
불멸의 삶을 살고있는 김신이 오랜 세월 동안 머물러 온 저택은 이 드라마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 공간이다. 이 저택은 고요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외롭고 무거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넓은 내부 공간, 적은 가구, 높은 천장, 어두운 조명은 김신의 불멸과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지만 따뜻함보다는 쓸쓸함이 먼저 느껴지고, 늘 정갈하게 정리된 공간이 오히려 감정을 정지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공간은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라, 오랜 기억이 쌓인 ‘시간의 상자’에 가깝다. 천 년을 살아온 존재가 그 모든 세월 동안 바꾸지 않은 구조, 들어오는 이는 없고 나가는 이는 드문 저택의 형태는 곧 김신이라는 캐릭터 자체를 닮았다. 하지만 지은탁이 등장한 이후, 이 공간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집안의 분위기는 달라지고, 무채색의 공간 안에 따뜻한 빛이 생겨난다. 이는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인물이 변화함에 따라 공간도 감정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저택은 고독의 상징에서 사랑의 공간으로 진화하며, 감정의 외부화 역할을 수행한다.
바닷가 절벽 – 선택과 이별의 경계
<도깨비>에서 바닷가 절벽은 단지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다. 이 공간은 김신의 생과 사, 사랑과 이별의 중간 지점이며, 물리적으로는 절벽이지만 상징적으로는 ‘감정의 선택지’를 나타낸다. 김신은 이곳에서 지은탁에게 도깨비 검을 뽑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공간은 두 사람의 운명이 갈라지는 중요한 기점으로 반복된다.
푸른 바다와 흰 모래, 그리고 가만히 선 두 인물. 이 장면은 매우 정적인 구성이지만, 감정의 긴장감은 극도로 높다. 공간은 침묵 속에서 강한 선택을 요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감정을 통해 이별의 의미를 마주하게 된다. 절벽이라는 물리적 구조는 곧 ‘갈 수 없는 곳’,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상징한다. 드라마의 말미에서 다시 이 공간이 등장할 때, 시청자는 감정을 되짚게 되고, 한 번의 선택이 만들어낸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처럼 공간은 단지 장소가 아니라, 기억을 소환하고 감정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퀘벡의 거리 – 시간을 가로지르는 감정의 회랑
캐나다 퀘벡의 거리와 교회, 골목은 이 드라마의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국적인 장소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건축 양식은, 김신의 존재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특히 눈 내리는 골목에서 김신과 지은탁이 마주하는 장면은 시청자에게 오랜 기다림과 운명 같은 감정을 동시에 전달한다.
퀘벡의 공간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볼 때마다 의미가 달라진다. 처음엔 막연한 기다림이 깃든 공간이었고, 다음엔 이별 후 회상의 공간이 되며, 마지막엔 다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다. 이처럼 공간은 시간에 따라 감정을 재구성하고, 인물 간의 관계 변화를 축적하는 역할을 한다. 교회 앞 계단에 앉은 김신의 모습은 멈춘 시간처럼 느껴지고, 골목을 향해 걸어오는 지은탁의 장면은 그 멈춤을 깨는 기폭제가 된다. 퀘벡은 물리적으로는 한국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공간이지만, 감정적으로는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장소다. 공간이 시간을 끌어안고 감정을 완성시키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저승사자의 공간 – 망각과 죄책감이 머무는 정적인 무대
도깨비 저택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은 바로 저승사자의 집이다. 이 공간은 극 중에서 가장 무채색에 가까운 공간으로, 감정이 차단된 채 반복되는 일상을 상징한다. 커튼이 거의 드리워져 있고, 자연광이 최소화된 이 집은 감정의 표정이 없는 저승사자의 내면과 닮아 있다. 넓고 비어 있는 실내, 쓸쓸한 조명, 거의 움직이지 않는 가구 구조는 마치 기억이 지워진 자의 빈 공간을 시각화한 듯하다. 실제로 저승사자는 과거의 기억을 갖지 못한 채 이 공간에서 '정해진 역할'만 수행한다. 이는 공간이 인물의 정체성과 기억의 유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하지만 이 공간 역시 변화한다. 써니와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그 무채색 공간에 온기가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커튼이 열리고, 테이블 위에 커피잔이 놓이며, 공간에 사람의 흔적이 남기 시작한다. 감정이 흐르기 시작하면, 공간도 따뜻해진다. 그 감정이 상실로 되돌아가는 순간, 공간은 다시 정적과 공백으로 가득 찬다. 저승사자의 방은 결국 ‘망각과 기억’, ‘죄책감과 용서’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무대이며, 그 변화의 흐름을 말 없이 보여주는 심리적 내면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