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⑨<빈센조> – 금가프라자, 정의와 권력의 경계에 선 공간
법보다 공간이 먼저 움직이는 드라마
마피아 변호사라는 독특한 소재로 방영된<빈센조>는 범죄, 복수, 블랙코미디가 절묘하게 혼합된 장르물이다. 이 드라마에서 법은 무기력하고, 말은 통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누가 어디를 점유하고 있는가, 즉 공간의 주도권이다. 빈센조는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 변호사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그가 돌아온 한국에서 선택한 무대는 낡고 허름한 건물 ‘금가프라자’다.
이 장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지하에는 거대한 금괴가 숨겨져 있고, 지상에는 개성 강한 상가 세입자들이 버티고 있으며, 외부에는 바벨그룹이라는 자본 권력이 침범하고 있다. 이렇게 물리적 공간이 권력, 돈, 정의, 공동체, 범죄 등 다양한 상징을 동시에 안고 있는 구조는 <빈센조>가 공간을 통해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금가프라자 – 금괴와 정의가 공존하는 공간의 역설
금가프라자는 외형상 낡고 비효율적인 상가 건물이다. 그러나 내부 구조는 복잡하고, 지하에는 무려 수천억 원 규모의 금괴가 숨겨져 있다. 이 구조 자체가 <빈센조>가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를 품고 있다. 겉으로는 무력하고 폐쇄적이지만, 안에는 절대적 가치가 숨어 있는 공간. 이는 빈센조라는 인물의 이중성과도 연결된다. 그 또한 겉으로는 변호사지만, 내면엔 마피아로서의 무자비함과 생존 본능이 살아 있다.
또한 금가프라자는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이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세입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며, 서로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저항과 공존을 반복한다. 그러나 결국 이 공간은 그들의 의지와 연대에 따라 점점 단단해지고, 끝내는 바벨그룹이라는 절대 권력에 맞서는 거점으로 탈바꿈한다. 금괴와 정의,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하면서, 이 건물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닌 감정과 윤리, 현실이 중첩된 상징 공간으로 진화한다.
지하실과 옥상 – 이중 구조로 드러나는 권력의 흐름
금가프라자의 공간 구조에서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지하와 옥상이다. 지하는 은밀함과 욕망의 공간이다. 금괴가 숨겨져 있고, 빈센조는 이 공간을 통해 자신의 복수 계획을 완성한다. 반면 옥상은 주로 인물들이 사적인 감정을 나누거나, 하늘을 보며 고독에 잠기는 장소로 그려진다. 한 건물 안에 상하로 구분된 이 구조는 감정과 권력, 이상과 현실이 수직적으로 대비되는 시각적 장치다.
옥상은 때때로 도망치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몇몇 갈등 장면은 옥상에서 절정에 이르기도 하고, 인물의 고백이나 전환점이 이곳에서 발생한다. 반면 지하는 갈등을 계획하고 처리하는 공간이다. 감춰야 하는 것,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모두 이곳에서 움직인다. 이렇게 공간의 위아래 구도는 시청자에게 심리의 방향과 사건의 무게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공간이 곧 감정의 무대가 되는 순간이다.
공간을 점령하라 – 건물 싸움이 곧 정의 싸움이 되는 세계
<빈센조>는 공간이 권력의 전장이 된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바벨그룹은 법과 폭력을 동원해 금가프라자를 철거하려 하고, 빈센조와 세입자들은 이 공간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단순히 한 채의 건물 문제가 아니다. 그 속엔 ‘누구의 정의가 살아남는가’, ‘어떤 가치가 끝내 승리하는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다. 공간을 지켜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켜내는 일과 직결된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금가프라자는 단지 싸움터가 아니라 ‘새로운 법의 적용지’가 된다. 기존의 법으로는 악을 제어할 수 없기에, 빈센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해석하고 통제한다. 그는 이 건물을 재건축하지 않고 복원하며, 금괴를 땅속에 묻은 채로 새로운 공동체의 기틀로 삼는다. 공간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도구로 쓰일 수 있지만, 동시에 연대와 회복의 근거지가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이 여기서 완성된다.
빈센조의 공간은 권력의 도식이자 감정의 구조다
빈센조는 법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공간을 언어처럼 사용한다. 말 대신 건물을, 이상 대신 설계를 통해 권력의 역학을 조정한다. 그리고 금가프라자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 얼마나 복잡한 정서와 권력, 그리고 기억을 품을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공간 하나로 캐릭터의 내면을 보여주고, 세계관의 가치 구조를 표현하는 <빈센조>는 그 점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공간을 활용한 드라마 중 하나다.
금가프라자의 외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이동, 권력의 충돌, 정의의 진화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처럼 <빈센조>는 공간을 통해 움직임을 만들고, 공간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며, 공간을 통해 ‘끝내 살아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결국 금가프라자는 욕망의 저장고인 동시에, 치열한 인간 군상이 부딪히며 새로운 정의를 빚어낸 현대적 신화의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