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 – Ep.05 체육관과 옥탑방, 우리도 그 어딘가에 살았었다
체육관, ‘나는 여기 있다’고 외치던 그 시절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1998년 슬품과 좌절이 가득하던 시대에 빛이나는 청춘들의 평범한 이야기고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 아픈 이야기다. 체육관 바닥의 먼지, 휘어진 철봉, 무채색 옥탑방의 벽지처럼 이 드라마는 삶의 일부였던 공간들을 너무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 시절, 우리 역시 매일을 살아냈다. 무언가 되겠다는 생각은 막연했고,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땀은 흘렸고, 가슴은 떨렸고, 세상은 확실히 낯설었다.
체육관은 나희도가 모든 걸 던지던 공간이다. 말 그대로 몸을 던져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곳. 지금 40대에게도 그런 체육관이 있었다. 누군가는 회사였고, 누군가는 강의실이었고, 누군가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자취방 안의 책상이었다. 어쨌든 그곳에서 우리는 증명받길 원했고, 남보다 더 나아지길 바랐다. 체육관은 공간 그 자체보다, '나는 여기 있다'는 외침을 집어넣었던 감정의 상자였던 셈이다.
옥탑방, 좁지만 가장 솔직했던 방
옥탑방은 백이진의 공간이었다. 기자를 준비하며 생계와 꿈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텨내던 곳. 좁고, 습하고, 햇빛도 반밖에 안 들던 그 방은 의외로 따뜻하게 기억된다. 마치 오래된 셔츠처럼 낡았지만 익숙하고, 지저분하지만 편안한 공간으로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도 그런 방에서 살았다. 다림질 하나 하지 않은 셔츠를 입고, 통조림에 밥을 비벼 먹고, 친구를 불러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믿던 시절.
옥탑방의 낮은 천장 아래엔 세상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좌절과 가능성, 외로움과 희망이 섞여 있던 그 시절은 꼭 누군가의 방 한 켠에 접어둔 이불처럼 얌전히 남아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 옥탑방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너도 그랬지? 내일은 늘 불안했고, 지금은 참 외로웠지? 그래서 그 방이 추억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낡은 공간, 가장 인간다웠던 시간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보여주는 공간은 모두 다 낡아 있다. 바닥은 삐걱거리고, 벽지는 갈라져 있고, 샤워기의 물은 찔끔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희도와 백이진은 울고 웃고 싸우고 고백한다. 삶이란 그렇게 허름한 틀 안에서도 자라난다. 누군가를 향해 내 마음을 건네는 순간은 반듯한 거실보다 삐걱거리는 마루에서 더 자주 찾아온다.
지금 40대인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말끔해진 삶 속에서 가끔 허름한 공간을 그리워한다. 감정을 쏟아도 되는 공간, 감정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시간.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런 감정의 방을 되살려준다. 그 시절, 공간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솔직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보면, 우리가 가장 인간다웠던 건 바로 그 낡은 공간들 안에서였다.
안정한 지반 위에서 피어났던 꿈
청춘의 공간은 늘 불안정하다. 나희도가 훈련을 받던 체육관엔 승패가 있었다. 백이진이 지냈던 옥탑방엔 잔고가 있었다. 둘 다 명확한 잣대지만, 동시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지반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위에서 사랑도 하고, 꿈도 꾸고, 세상을 믿기도 했다.
40대인 우리는 지금 더 단단한 집에 살고, 더 비싼 가구를 쓰고 있지만, 때때로 마음은 그 불안한 청춘의 방을 그리워한다. 벽 하나 너머로 들리던 이웃의 소리, 얇은 이불 속의 한기, 두꺼운 책에 줄을 긋던 손의 열기. 그것들이 지금은 사라진 감정의 증거들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 기억을 정직하게 복원해낸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사실은 아직 내 안에 조용히 남아 있음을, 이 드라마는 말없이 보여준다.
지금 내가 머무는 공간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깨닫는다. 공간은 단지 머물렀던 장소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 나를 얼마나 드러냈는지, 누군가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무얼 간직하고 무엇을 버렸는지가 더 중요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속 공간은 우리를 과거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다시 묻는다. 지금 당신이 머무는 공간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40대의 삶은 바쁘고 복잡하다. 공간은 점점 기능적으로 바뀌고, 감정은 어디론가 밀려난다. 이 드라마는 그럴수록 우리가 공간 안에 더 많은 감정을 담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래야 삶이 ‘머무는 일’이 아닌 ‘살아내는 일’이 된다고. 그러니 지금 이 방 한 켠이라도, 마음을 기대고 쉴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결국 지나온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