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가 그려낸 ‘제주’는 여전히 이상향일까
<폭싹 속았수다>는 1950년대~현재까지 제주를 배경으로, 세대를 이어 여성이자 어머니의 삶을 제주 방언과 감성으로 담아낸 드라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가장 묵직한 특징은 제주라는 공간이 더 이상 낭만만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흔히 제주 하면 떠오르는 ‘자연, 평화, 쉼’의 이미지를 넘어서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안에 숨겨진 가부장제의 권력, 여성의 고된 노동, 억눌린 감정을 조용히 펼쳐 보인다.
특히 공간 배치는 애순이의 삶을 극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초가집의 낮은 천장, 벽 없는 방 구조, 외부에 노출된 부엌과 우물 그리고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의 시선이 쉽게 닿는 생활 동선은 사적 공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감정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제주 초가집은 쉼의 공간이 아닌 노동의 현장이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여성들이 거주하는 집은 전형적인 제주 초가 구조로 흙 바닥에 돌담이 둘러싸인 집, 바람을 막기 위한 좁은 출입문 그리고 바깥일과 안일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생활 방식은 이 공간이 안락함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노동의 확장선임을 보여준다. 주인공 애순이 누워 쉬는 장면조차, 배경에선 김이 서려 있고 뒤편에선 다른 가족이 논밭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이 공간이 누군가의 고단함과 쉼 없이 얽혀 있는 구조임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즉, 이 집은 ‘내 방’, ‘내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보다는 가족과 생존을 우선시하던 시대의 공간 윤리를 반영하고 있다.
안방과 부엌 사이, 여성의 삶은 어디에 있었나
재미있는 건, <폭싹 속았수다>에서 남성 인물들이 주로 머무는 ‘안방’은 항상 정갈하고, 빛이 잘 들며,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반면, 여성들이 시간을 보내는 부엌은 좁고 어둡고, 외부와 연결된 회색 공간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의 공간의 대비는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공간이 말하는 권력의 위치다.
애순이와 다른 여성들이 부엌과 마당 사이에서 노동과 감정을 나누는 동안 남성들은 안방에서 결정을 내리고 명령을 내린다.
<폭싹 속았수다>의 카메라는 이 공간 구분을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강조한다.
말하지 않아도 공간은 말한다.
누가 중심에 있고, 누가 들러리로 살아야 했는지를...
제주의 자연은 누구에게 아름다웠는가
제주의 바다, 들판, 한라산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은 분명 아름답지만, <폭싹 속았수다>에서 그것은 단지 풍경이 아니다. 바다는 해녀로서 애순의 고단함이 깃든 장소이며 밭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고개 숙여야 했던 땅이다. 자연은 쉼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존의 현장인 것이다. 카메라는 종종 그 아름다움을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낸다. 먼 풍경보다 가까운 손, 굽은 허리, 흔들리는 쟁기 자국을 먼저 보여준다. 이것이 <폭싹 속았수다>가 ‘제주판 노동의 풍경화’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현대의 제주가 ‘쉼과 낭만’의 대명사가 됐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 드라마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 땅 위의 과거가 그렇게 고단했기에, 지금의 제주가 그렇게 이상화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폭싹 속았수다>의 제주 초가집은 단순 과거의 집이라기 보다는 그 안에는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질문이 숨어 있다.
‘집은 누구의 공간이어야 하는가?’
‘노동 없는 공간이 정말 이상적인가?’
‘쉼이 있는 집이란 무엇인가?’
드라마는 이를 과거를 빌려 현재를 조용히 되묻는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아파트라는 획일화된 거주공간에서 점점 고립되고 가족 간 거리도 심리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런 시대에 <폭싹 속았수다>는 말한다.
공간은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함께 견디고, 함께 버티는 감정이 쌓여야 그곳이 진짜 ‘삶의 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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