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공간

‘천국의 계단’ 속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 20년 전과 지금 비교(2000년대 드라마 속 풍경 변화 시리즈 5)

view0920-1 2025. 6. 27. 11:54

‘천국의 계단’이 만들어낸 정동길의 상징성 

2003년 겨울,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은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권상우와 최지우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고지식한 착한 남자와 불치병에 걸린 여자라는 고전적 서사 구조는 당시로서는 낯설지 않았지만, 눈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걷던 ‘정동길’의 풍경은 너무도 강렬했다. 서울 중심부, 고궁과 서양식 건물이 어우러진 이 조용한 길은 이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강하게 각인되었다.

특히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장소가 바로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제일교회 앞 거리였다. 극 중 주인공 정서(최지우 분)는 시련이 닥칠 때마다 이 길을 홀로 걷곤 했고, 차송주(권상우 분)는 그녀를 뒤따르며 사랑을 키워갔다. 그 장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두 사람의 감정선을 시각적으로 강화시키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울퉁불퉁한 돌담길, 한적한 벤치, 가로등이 은은하게 비치는 겨울 저녁.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감성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천국의 계단’은 증명해 냈다.

드라마 방영 이후, 정동길은 일약 드라마 성지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SNS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천국의 계단 코스’라는 입소문이 퍼졌고, 정동길을 따라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것이 서울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덕수궁 앞에서 자전거를 끌고 인증사을 찍는 것이 일종의 문화처럼 여겨졌으며, 연인들 사이에서도 이 길은 로맨틱한 산책로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서울이 변하면서, 이 길도 조용히 변화의 흐름 속에 들어서게 되었다.

 

'천국의 계단'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 그때와 지금의 공간 변화 

2003년 ‘천국의 계단’이 방영될 당시 정동길은 ‘서울 속의 유럽’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서양식 건축물인 정동제일교회, 구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중명전 등이 조밀하게 모여 있어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한적함’이 그 매력을 배가시켰다. 당시 서울시는 이 지역을 특별한 방식으로 개발하거나 홍보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 자연스러운 감성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정동길은 서울시의 걷고 싶은 거리 사업과 여러 문화재 보존 정책에 의해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길바닥은 새로 포장되고, 각종 표지판과 조명이 설치되었으며,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로 지정돼 축제와 문화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물론 이런 변화는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천국의 계단’이 남긴 감성과는 조금씩 거리가 생겼다. 드라마 속 자전거 한 대가 지나던 조용한 돌담길은 이제 인파와 포토존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덕수궁 돌담길의 개방 확대다. 과거에는 일부 구간만 개방되어 있어 제한된 범위에서만 산책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돌담길 전체를 도보로 연결해 시민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서울시가 ‘재혼 금지의 전설’로 알려진 돌담길의 미신을 깨기 위해 연인의 산책길 코스로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그 결과, 이 길은 더 이상 ‘조용한 감성 산책길’이 아니라 ‘도심 속 데이트 명소’가 되었다.

‘천국의 계단’ 속 정동길을 기대하고 찾은 사람들은 때로 실망하기도 한다. 그 시절의 고요한 감성은 사라지고, 이벤트와 인파로 북적이는 관광지의 느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 공간은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그 변화가 감성의 밀도를 떨어뜨릴 때 우리는 공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드라마 속 공간은 왜 감성 콘텐츠가 되는가?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이 단순한 길이 아닌 ‘기억의 공간’이 된 것은, 그곳이 한 드라마 속 감정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군가가 슬퍼했고, 사랑했고, 기다렸기 때문에 그 장소를 특별하게 여긴다. ‘천국의 계단’은 정동길을 단순한 촬영 장소로 소비하지 않고, 서사와 감정을 입힌 공간으로 연출했다. 그래서 그곳은 하나의 감성 콘텐츠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었다.

드라마 속 공간이 실제 관광 콘텐츠로 확장되는 이유는 바로 이 ‘감정의 투사’ 덕분이다. 시청자는 자신이 보던 드라마의 장면을 기억하며, 그것을 현실에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천국의 계단’의 정동길처럼, 드라마가 감정의 고조점을 이끌어낸 장소는 그 자체로 감정 소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소비는 단순한 ‘인증사진’을 넘어서서, 걷고, 머물고, 느끼는 감정적 행위로 이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감성 콘텐츠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적 소비와 충돌하게 된다. 포토존이 생기고, 행사장이 생기고, 인파가 몰리면 본래의 감정은 희석되기 마련이다. ‘천국의 계단’이 남긴 낭만은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지만, 정동길을 찾는 오늘날의 방문객은 더 이상 그 낭만을 오롯이 체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감성 콘텐츠로서의 공간이 갖는 유통기한과, 그 유효기간이 끝난 이후의 공간 활용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정동길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2003년의 감정과 같지는 않다. 이 변화는 아쉽지만 동시에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공간에 남겨진 감정을 어떻게 다시 해석하고 이어갈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감성 콘텐츠를 진짜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지금 걷는 정동길, 20년 전 감성을 다시 만나는 법 

지금 정동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거리 산책이 아니라 기억과의 재회다. 눈 내리는 날, 드라마 속에서 두 사람이 조용히 걸었던 그 길은 이제 관광객의 발걸음과 SNS 포토존으로 가득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여전히 그 감정을 복원할 수 있다. 아침 이른 시간, 혹은 비 오는 오후, 정동길을 걸으며 과거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는 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최근에는 ‘사라진 드라마 공간’을 찾는 감성 워킹 콘텐츠가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정동길 역시 그러한 콘텐츠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단지 “여기서 촬영했다”는 안내판이 아니라, “여기서 이런 감정이 있었다”는 정서 기반 스토리텔링이 결합된다면, 정동길은 다시 한번 감성을 품은 도시 콘텐츠로 재탄생할 수 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울 감성 걷기 코스’나 문화재청의 ‘스토리 있는 거리 프로젝트’ 등과 연계해, 드라마 감성을 체험하는 콘텐츠형 도보여행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또한, ‘천국의 계단’을 기억하는 세대뿐 아니라, 그 드라마를 몰랐던 젊은 세대에게도 이 공간은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 정제된 거리, 느린 속도로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은 디지털 시대의 감정 회복 공간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이 다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남을 수 있도록 감성적 접근을 강화하는 일이다.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은 이제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독특한 장소가 되었다. 2003년의 드라마가 남긴 감성, 2020년대의 도시 흐름, 그리고 미래의 콘텐츠가 이곳에서 겹칠 때, 서울이라는 도시는 다시 감정을 품은 공간으로 살아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정동길을 걷는 이유는, 그 모든 시간이 중첩된 장소에서 과거를 만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