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서울, '파리의 연인'이 만든 도시의 감성 풍경
2004년 방영된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은 단순한 로맨스 드라마 이상의 존재였다. 박신양과 김정은이 그려낸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는, 전형적이지만 대중적인 스토리 구조 덕분에 당시 시청률 50%를 넘기며 시대의 드라마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 제목은 ‘파리’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 시청자들이 가장 많이 접하고 기억한 장면은 서울의 거리였다. 극 중 많은 장면이 서울 중심부에서 촬영되었으며, 특히 강남, 명동, 청담, 한남동 등 상징적인 도시 공간들이 주 무대가 되었다.
드라마 속 서울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의 사회적 위치와 감정 상태를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한성(박신양)이 등장할 때는 주로 고급 오피스가 밀집한 강남 일대가, 태영(김정은)이 홀로 고민하거나 걸을 때는 명동이나 청계천처럼 시민의 삶과 가까운 공간이 자주 등장했다. 이처럼 ‘파리의 연인’은 2000년대 초반 서울의 풍경의 드라마를 통해 감성적으로 포장하고, 대중에게 서울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야외 촬영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 서울의 거리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복잡한 이면도로, 광화문 앞의 붐비는 인도, 테헤란로의 야경, 성수대교의 도시 불빛까지. 이 공간들은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드라마 속 서울”로 남았고, 일부 장소는 촬영지라는 이유만으로 팬들의 성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지금 그 장소들을 다시 찾아가 보면, 당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마주하게 된다. 도시의 변화는 빠르고, 기억은 흐려지지만, ‘파리의 연인’ 속 서울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 본 서울 주요 공간의 변화
‘파리의 연인’이 가장 자주 배경으로 삼았던 지역은 바로 강남 테헤란로 일대였다. 당시는 IT 기업과 대기업 본사가 밀집하면서 ‘성공’과 ‘권위’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드라마에서 한성이 타고 다니던 고급 차량, 배경으로 보이던 고층빌딩, 그리고 조용한 회의실 장면들은 서울 강남을 ‘권력과 돈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지금의 테헤란로는 더 많은 빌딩이 들어서고, 유동인구도 많아졌지만, 드라마에서 묘사되던 ‘조용한 도시의 여백’은 사라진 상태다. 개발이 더해질수록 과거의 ‘정적인 분위기’는 줄어들었고, 지금은 오히려 과밀과 소음이 도시의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태영이 자주 걸었던 명동, 청계천 인근의 골목길은 당시에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던 곳이었지만, 현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2000년대 초반 명동은 패션과 대중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그 자체로 ‘서울의 감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거리였다. 드라마는 그 골목길을 통해 태영의 내면을 표현했고, 촘촘하게 들어선 작은 가게들과 그 앞을 바쁘게 지나던 사람들은 현실 속 서울과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하지만 현재 명동은 코로나19 이후 관광 상권이 급속히 쇠퇴했고, 거리 곳곳이 공실 상태다. 해외 관광객이 회복되지 않은 지금, 드라마에 나왔던 생기 넘치는 골목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청담동의 고급 레스토랑도 자주 등장한 공간 중 하나다. 당시 청담은 연예기획사, 패션 브랜드, 프라이빗 레스토랑이 모여 있어 ‘스타의 거리’라 불렸고, 드라마에서도 재벌가의 삶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청담 상권의 중심이 성수동이나 한남동으로 넘어가며, 과거의 화려함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모습이다. 같은 장소지만 시대에 따라 의미와 분위기는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파리의 연인’은 보여주었다.
'파리의 연인' 속 서울의 감성과 지금 서울의 거리감
2004년 ‘파리의 연인’이 방영될 당시, 서울은 아직 고속철도(KTX)가 갓 도입된 시기였고, 도시재생보다는 재개발 중심의 도시 성장 패턴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만큼 드라마 속 서울은 지금보다 다소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도시로 표현되었다. 도로 표지판은 지금처럼 세련되지 않았고, 건물 외관은 노후했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활기가 있었다. 공중전화박스, 빨간 우체통, 포장마차 등 지금은 보기 힘든 도시 풍경이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 서울은 이제 찾기 힘들다. 현대의 서울은 훨씬 더 매끈하고 정리된 인상을 준다. 거리는 깨끗하지만 표준화되어 있고, 특색 있는 골목은 카페 거리로 재편되거나 재개발로 사라진 경우가 많다. 드라마 속에서 느껴졌던 서울 특유의 서사성 있는 거리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특히 한성의 집이나 태영이 일하던 출판사 같은 공간은 지금 같으면 공유오피스나 코워킹스페이스로 대체됐을 것이다. 도시는 바뀌었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이 겪는 감정의 밀도는 오히려 낮아진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드라마 소비 방식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일주일에 두 번 TV 앞에 앉아 정해진 시간에 드라마를 기다리는 ‘리듬감 있는 시청’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OTT 플랫폼을 통해 한 번에 몰아보는 시대다. 도시와 드라마가 함께 성장했던 시기는 이제 지나갔고, 도시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던 시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파리의 연인’ 속 서울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공간이 변화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은 더욱 과거에 머물게 되고, 그 감정은 서울을 걷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과거의 드라마, 사라진 풍경, 그리고 오늘의 여행 콘텐츠
드라마 속 서울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기억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파리의 연인’에 등장했던 거리, 골목, 카페는 지금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그 공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같은 장소다. 그래서 최근에는 과거 드라마 속 장소를 따라 걷는 ‘기억 기반 여행 콘텐츠’가 점점 주목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촬영지를 찾는 수준을 넘어, 과거의 감성과 현재의 도시를 연결하는 감성적인 접근 방식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끊임없이 변한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거리의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건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공간에 담겼던 이야기와 감정이다. 지금 강남을 걷는다면 한성이 바라보던 도시의 불빛은 사라졌을 수 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도시와 사람, 드라마는 함께 시간을 지나간다.
‘파리의 연인’ 속 서울을 따라 걸어보는 여행은 단순한 촬영지 탐방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어떻게 감정을 저장하고 변화시키는지를 살펴보는 문화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의 도시를 이해하려면, 과거의 도시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파리의 연인’은 지금도 유효한 콘텐츠다. 비록 거리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은 오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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