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공간

‘봄날’ 촬영지로 등장했던 남대문 시장, 20년 후 변화 분석(2000년대 드라마 속 풍경 변화 시리즈 8)

view0920-1 2025. 6. 28. 14:44

드라마 ‘봄날’이 남긴 정서와 서울의 시장 풍경 

2005년 방영된 SBS 드라마 ‘봄날’은 바닷가 병원을 배경으로 시작해 도시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주인공들의 심리적 치유와 성장 과정을 그린 감성 멜로드라마였다. 고수, 지진희, 이미연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절제된 감정선과 섬세한 연출로 많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드라마의 주요 무대는 제주였지만, 중반 이후 등장인물들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남대문 시장 일대가 현실 공간으로 자주 등장했다.

특히 고수가 맡은 주인공 ‘고은섭’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던 시장 뒷골목, 포장마차, 재래시장 안 상점, 오래된 철제 셔터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당시 서울의 도시적 빈틈과 감성의 여백을 잘 담아낸 부분이었다. 번쩍이는 쇼핑몰이나 강남의 고급 건물들과 달리, 남대문 시장은 언제나 사람과 삶이 먼저인 공간이었다. 드라마는 그런 시장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 따뜻하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했다.

당시 남대문 시장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을 모색하던 한국의 경제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서민 경제의 중심지였다. 골목 골목마다 인파가 몰리고, 상인들의 외침이 넘쳐났으며, 포장마차 앞에서는 사람들이 분식 한 접시에 웃고 울었다. 드라마는 그 모든 풍경을 조용히 담아냈고, 시청자는 주인공이 서 있는 그 장소에서 자신의 현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남대문 시장은 ‘서울의 얼굴’이었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일상’이기도 했다.

 

'봄날' 주인공이 상경 후 현실 공간으로 자주 등장한 남대문 시장

20년의 세월, 남대문 시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2020년대 중반, 남대문 시장은 여전히 살아 있는 시장이지만, 그 모습은 2005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상권의 구조와 방문객의 성격이다. 과거에는 주로 국내 소비자와 동네 단골, 서울 시민 중심으로 형성된 ‘생활 밀착형 시장’이었다면, 지금의 남대문 시장은 외국인 관광객, 특히 아시아권 방문객 중심의 관광형 시장으로 재편되었다.

이로 인해 점포 구성도 크게 변화했다. 의류와 잡화 위주였던 매장들 사이로 화장품, 기념품, 전자제품, 스마트폰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관광객 전용 매장이 늘어났다. 심지어 일부 상점은 간판이나 가격표를 한국어보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먼저 표기하고, 관광 패키지 투어 버스가 일정 시간마다 시장 앞에 정차한다. 이런 변화는 시장의 정체성과 분위기 자체를 바꿔놓았다.

또한, 2008년 발생했던 남대문 화재 사건은 이 지역의 구조적 대대적 리모델링을 촉발했다. 화재로 인한 피해 복구 이후, 시장 곳곳에는 현대식 아케이드, 방수 천막, CCTV 시스템이 도입됐고, 간판 정비와 위생 점검 등이 강화되며 예전의 ‘정돈되지 않은 풍경’은 많이 사라졌다. 물론 이는 안전과 이용 편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지만, 동시에 드라마 속에서 느껴졌던 서민적이고 정감 있는 정서는 옅어졌다.

포장마차 또한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시장 안 골목마다 붕어빵, 떡볶이, 튀김, 국수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현재는 위생과 소방 안전 규제 강화로 인해 다수 철거되거나 상가 내부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 국수를 먹으며 생각에 잠기던 풍경은 이제 시장 곳곳의 푸드코트와 상점형 음식점으로 대체되었다. 활기와 위생은 개선되었지만, 그 대신 정서적 풍경의 깊이는 줄어든 셈이다.

 

 

변화 속에 사라진 감성, 드라마 명소로서의 지속 가능성은? 

‘봄날’이 남긴 남대문 시장의 풍경은 단지 배경이 아닌, 일상과 감정이 함께 흐르던 공간이었다. 고은섭이 시장 한복판에서 일하며 보내는 하루는 시청자들에게 평범한 삶 속 진정성을 느끼게 했고, 누군가는 드라마를 보며 “저 골목, 우리 엄마가 다니던 시장인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 골목은 대부분 리모델링되어, 그 시절의 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드라마 명소로서의 남대문 시장은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정답은 ‘물리적 유지’가 아니라 감성적 재해석에 있다. 지금의 남대문 시장은 물리적으로 달라졌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상인의 외침, 이른 새벽 배달 차량, 할인 가격을 흥정하는 손님, 두 손 가득 짐을 든 사람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풍경이며, 지금의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은 예전보다 감성 콘텐츠의 제작 환경이 더 유리하다. 유튜브, 블로그, 숏폼 영상 콘텐츠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을 다시 소환하고, 그 감정을 재조립할 수 있다. 과거 드라마 명소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복원하거나, 현재의 시장 상인 인터뷰를 삽입하는 등 스토리 기반 콘텐츠 기획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드라마 명소의 본질은 결국 ‘감정과 기억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대문 시장 자체가 여전히 서울의 상징적 장소라는 점은 콘텐츠 확장에 있어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교통 접근성, 상시 방문 가능성, 주변 관광 인프라 등은 여전히 경쟁력이 높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드라마 정서를 현재의 풍경과 연결시키는 감성 큐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감성 골목 걷기’, ‘드라마 속 시장 풍경 체험 코스’ 등은 실현 가능한 관광+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다시 걷는 남대문 시장, 드라마 감성은 살아 있는가? 

2025년 현재, 남대문 시장은 더 넓어졌고, 더 깨끗해졌으며, 더 관광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의 흔적은 있다. 평일 이른 아침, 상점들이 막 셔터를 올릴 때. 오후 늦게 시장 뒷골목을 걷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 노점상 옆에서 누군가 삼각김밥을 먹으며 혼자 있는 풍경. 우리는 그 속에서 여전히 ‘봄날’의 잔상을 본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그 드라마가 담아냈던 공간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 속에 존재한다. 비록 똑같은 벽돌담은 사라졌고, 포장마차는 줄었으며, 골목의 구조가 바뀌었지만, 그 공간에서 나눴던 대사, 눈빛, 감정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정을 따라 다시 걷는다. 단순히 예전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대문 시장은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다. 20년 전 드라마 ‘봄날’이 그것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냈고, 우리는 지금도 그 감성을 재현할 수 있다. 결국 드라마 명소란 그 장소가 무엇을 보여주었는가보다, 그 장소가 어떤 감정을 남겼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남대문 시장은, 그 감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서울의 공간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