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이 남긴 공간, 그 시절 서울의 궁궐과 골목
2003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한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극 중 하나로 기록된다. 실제 역사 인물인 장금이를 모티브로 삼은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 궁중 요리와 의학을 소재로 하며,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영애가 연기한 ‘장금이’는 단순한 캐릭터를 넘어 ‘성실과 인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드라마 속 배경인 궁궐과 전통 골목은 그 자체로 한국 문화의 얼굴이 되었다.
이 드라마는 주로 경남 합천의 영화 세트장에서 촬영되었지만, 극 중에서 서울 장면이 필요한 경우에는 실제 창덕궁과 북촌 일대를 배경으로 활용했다. 장금이가 궁녀로 입궁하거나 중전과의 만남이 이뤄지던 장면, 혹은 궁 밖에서 은밀히 움직이던 인물들의 동선은 실제 창덕궁의 후원, 북촌의 돌담길 등에서 촬영되었고, 그 공간은 드라마의 역사적 사실감과 정서적 설득력을 높여주는 요소였다.
당시만 해도 북촌 한옥마을은 지금처럼 관광 명소로 알려지지 않았고, 창덕궁 역시 외국인 관광객보다는 국내 역사 교육용 공간으로 더 자주 이용되었다. 덕분에 드라마 속에서 보인 궁궐의 정적, 한옥 골목의 고요함은 실제 공간의 분위기와도 일치했으며, 시청자는 단지 사극의 배경이 아닌 ‘살아 있는 역사’를 체험하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장금’은 공간적 측면에서도 문화적 파급력이 매우 강력한 작품이었다.
북촌과 창덕궁, 20년 사이 어떻게 달라졌나?
2025년 현재, 창덕궁과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북촌은 ‘한옥 골목 인스타그램 성지’로 불릴 만큼 젊은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널리 알려진 만큼, 이 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장금’ 속 한적하고 고요했던 공간은 지금의 북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었다.
우선 창덕궁은 보존과 활용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궁궐의 보존 상태는 더욱 좋아졌으며, 관람 동선도 체계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관람객 수의 급증으로 인해, 후원 등 일부 지역은 사전 예약제로만 관람이 가능하고, 자유로운 접근은 제한적이다. 조용히 걸으며 사색할 수 있었던 ‘대장금’ 속의 궁궐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반면 북촌 한옥마을은 그 변화의 폭이 훨씬 크다. 과거에는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전통 주거지였지만, 드라마의 흥행과 더불어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많은 한옥이 게스트하우스, 갤러리, 카페, 기념품점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북촌 1~2길 일대는 이제 거주지라기보다 상업지구에 가까운 모습이다. 주민들은 과도한 관광객 유입에 따른 사생활 침해, 소음 문제 등을 겪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와 마을 커뮤니티는 방문 에티켓 캠페인과 출입 제한 구역 설정 등을 시행하고 있다.
‘대장금’이 방영될 당시 북촌의 풍경은 ‘시간이 멈춘 서울’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재의 북촌은 ‘시간을 상품화한 서울’로 바뀌었다. 풍경은 남았지만, 그 풍경을 둘러싼 감정과 밀도는 분명 달라졌다.
‘드라마로 기억된 장소’가 관광지로 전환될 때 생기는 현상
‘대장금’ 이후 창덕궁과 북촌이 드라마의 명소로 주목받게 되자, 관광 산업은 그 감성을 상업적 경험 콘텐츠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이는 일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드라마가 성공하면 그 공간은 브랜드가 되고, 브랜드가 되면 상품이 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공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정서적 농도와 서사적 분위기가 약화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북촌 일대는 ‘드라마 촬영지’라는 타이틀보다 지금은 ‘핫플레이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전통 한옥과 현대적 디저트카페, 빈티지 숍이 한 골목에 공존하는 특유의 문화 혼종성이 주목받는다. 그러나 이는 드라마 속 장금이가 걷던 한옥 골목의 정서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드라마가 남긴 정적인 분위기, 조용한 정원, 낮은 지붕 아래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인물들의 감정은 더 이상 그 골목에서 발견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콘텐츠 산업 전반에서 반복되고 있다. ‘감성 공간의 상품화’는 경제적 효과를 불러오지만, 동시에 감정의 희석도 수반한다. 드라마가 남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공간을 유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답은 ‘감성 콘텐츠 재설계’에 있다. 단순한 촬영지 안내판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어떤 상징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방식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북촌 골목길을 ‘대장금 감성 따라 걷기’로 구성하고, 특정 장소에선 해당 장면의 대사나 연출 의도를 QR코드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면, 감정과 공간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지금의 관광 콘텐츠는 시각 중심이지만, 드라마가 남긴 것은 감정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지금 다시 걷는 창덕궁과 북촌, 감성의 회복은 가능한가?
우리는 지금 ‘대장금’이 남긴 장소를 걷고 있다. 창덕궁 후원을 따라 걷는 발걸음, 북촌 골목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전통 창문 너머로 비치는 낮은 햇살. 풍경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여전히 되살릴 수 있다. 중요한 건 속도와 시선, 그리고 감정의 태도다.
지금 창덕궁과 북촌은 너무 빠르다. 방문객은 많고, 포토스팟은 넘치며, 스토리 없이 배경만 소비된다. 하지만 아침 일찍, 혹은 평일 오후 늦게, 사람들이 드문 시간에 이 거리를 걷는다면, 그 시절 드라마의 정서가 의외로 또렷이 떠오른다.
장금이가 중전의 부름을 받고 조용히 뛰어가던 후원의 돌길, 혼자 밤을 보내며 다짐하던 한옥의 마당. 우리는 그 장면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감정의 재생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그 감정은 내 안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으며, 그 감정이 자극되는 공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북촌과 창덕궁을 찾는다.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감정이 존재하는 한, ‘대장금’은 단지 과거의 드라마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감성 콘텐츠로 기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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