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복수는 기억이 머무는 공간에서 시작된다
사람에게 공간은 기억을 품는다. 특히 고통스러운 기억일수록, 그 공간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더 글로리>에서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는 공간은 교실과 계단이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폭력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폭력이 뿌리내렸던 장소까지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드라마 속 주인공 문동은은 과거 자신이 당했던 끔찍한 학교폭력의 현장을 ‘복수의 무대’로 바꾼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공간이 있다.
교실은 단지 수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들이 상처를 주고받는 폐쇄적 사회였다. 계단은 늘 폭력이 시작되거나, 도망치는 장면이 반복되는 장소였다. <더 글로리>는 이런 일상적 공간들을 통해 감정을 저장하고, 기억을 소환하며, 결국 복수의 근거지로 재창조한다. 그렇다면 드라마 속 교실과 계단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폭력의 기억과 복수의 감정을 담아내며, 드라마 전체의 서사 구조를 어떻게 떠받치고 있을까?
교실 – 폭력의 시작과 침묵의 공범자
<더 글로리>의 교실은 따뜻한 배움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교실은 잔인한 폭력이 반복되는 일상이며, 아무도 말리지 않는 침묵의 공범자다. 문동은은 이 교실에서 무참히 짓밟혔다. 교단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조차 아무 말 없이 외면했으며, 친구들은 눈을 피했다. 이 교실은 상징적으로 ‘무감각한 사회’를 나타낸다.
폭력은 주로 뒷자리에 앉은 가해자들에 의해 시작되고, 동은은 창가 자리에서 조용히 견뎌야 했다. 좌석 배치,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 벽에 걸린 학급 표어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 공간은 시청자에게 강한 불편함을 준다.
그 불편함은 바로 현실에서도 수없이 반복되는 학교 폭력의 구조적 방치를 상징한다. 동은이 이 교실을 다시 찾아올 때, 그 감정은 단순한 과거 회상의 차원이 아니다. 그녀는 그 공간을 직면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마주하고, 다시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결국 교실은 피해자의 고통과 무력함이 쌓인 공간에서, 복수와 정의를 실현하는 상징적인 무대로 변화한다.
계단 – 추락과 저항이 반복되는 장소
계단은 유독 자주 등장하는데 <더 글로리>에서 그곳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닌, 극적인 장면의 무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들이 동은을 끌고 가던 공간, 도망치며 비틀거리던 장소, 그리고 때로는 교사나 동료들이 지나가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외면하던 그곳이 계단은 물리적 거리만을 나타내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과 무기력 사이의 경계이며, 또한 인간성의 추락과 회복을 동시에 상징한다.
동은은 종종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두려움, 경계, 분노가 뒤섞여 있다. 반대로 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는 결심과 냉정함이 담겨 있다. 이런 반복된 시각 구조는 시청자에게 무의식적인 긴장감을 준다.
계단이라는 공간은 일상 속에서 누구나 익숙한 장소지만, <더 글로리>는 그곳에 비틀린 감정과 조용한 폭력을 심어놓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시청자는 동은의 감정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결국 계단은 그녀가 마주한 현실의 층계를 상징하고, 그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를 형상화한다.
상처의 무대를 복수의 공간으로 바꾸다
<더 글로리>는 상처가 쌓인 공간을 다시 복수의 공간으로 재창조한다. 그 과정은 단순한 복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교실과 계단은 고통의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이지만, 문동은은 그 공간을 다시 찾고, 마침내 자신의 방식대로 ‘다시 쓰기’를 시작한다.
공간은 흔적을 남긴다. 벽에 찍힌 자국, 땅에 떨어진 핏자국, 책상 밑에 적혀 있던 낙서. 이런 모든 흔적들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으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동은이 그 공간을 피하지 않고 다시 마주하는 것은 단지 복수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지 않고, 세상에 증명하려는 시도다.
교실에서 복수의 씨앗을 뿌리고, 계단에서 그 결심을 다진 문동은의 여정은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 공간과 감정의 결합이 만들어낸 심리극이다. 그녀의 복수는 단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질렀던 행위가 쌓여 있던 장소 그 자체를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
<더 글로리>는 그 점에서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기억과 감정의 저장소로 활용하는 매우 뛰어난 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섬세하게 짚어냈고, 그 지옥을 다시 살아가는 여정을 통해 치유와 복수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드라마 ×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④<펜트하우스> – 높이 올라갈수록 무너지는 인간성의 구조 (0) | 2025.07.01 |
---|---|
[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③<응답하라 1988> – 골목과 대문, 공동체를 품은 기억의 공간 (0) | 2025.07.01 |
[드라마는 공간으로 말한다] ① <미스터 션샤인> – 호텔 글로리, 조선의 내면을 품은 이중 공간 (0) | 2025.07.01 |
고려대의 가을, '로스쿨'이 남긴 질문 속을 걷다(서울을 걷는 드라마 5) (0) | 2025.06.30 |
공덕의 어느 날, ‘스타트업’이 피워낸 도시의 상상력(서울을 걷는 드라마 4) (0) | 2025.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