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공간

성수동의 어느 오후, ‘멜로가 체질’이 남긴 감정의 자리(서울을 걷는 드라마 2)

view0920-1 2025. 6. 29. 23:18

‘멜로가 체질’이 보여준 서울의 새로운 감성 풍경, 성수동

2019년 방영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유난히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 작품이었다.
대중적인 흥행은 크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는 내 얘기 같았다'고 말하는 팬이 많았다.
여성 3인의 서툴지만 진솔한 일상과 관계,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뭉클하게 전개됐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공간 활용의 감각이다.
등장인물들은 강남이나 홍대 같은 전형적인 드라마 배경지가 아닌,
지금의 서울에서 가장 독특한 감성을 가진 성수동에서 삶을 꾸려간다.
실제 드라마 속 주인공 임진주(천우희 분)의 집은 성수동 주택가에 있었고,
직장 동료들과 모이는 카페, 밤늦게 걷는 골목길,
감정이 요동치던 장면들이 하나같이 이 동네에 녹아 있었다.

성수동은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감정이 차오르고 식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회색 벽돌 골목, 철공소 옆 카페, 주차장 옆 갤러리,
이질적 공간이 혼재된 성수동의 모습은
'멜로가 체질'의 인물들이 가진 불완전함과 삶의 리듬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드라마 속 골목을 걷다, 지금의 성수동은 이렇게 다르다

‘멜로가 체질’ 방영 이후, 성수동은 ‘힙한 동네’를 넘어
도시 안에서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여행지로 자리 잡았다.
한때 산업단지였던 이 동네는
이제는 감성 카페, 편집숍, 전시 공간, 로스터리 카페 등이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촘촘히 들어선 서울 대표 로컬문화의 상징지다.

드라마 속 진주가 걷던 그 골목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수동 뚝섬역 8번 출구에서 10분쯤 걸으면,
철제 간판과 오래된 창고 건물이 남아 있는 거리에 도착한다.
낮에는 커피 향이 골목을 채우고,
저녁이면 조명이 흐릿하게 비춰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준다.

성수동은 여전히 낯선 느낌을 품고 있다.
전형적인 관광지와는 다르게,
이 거리에서는 늘 새로운 시도와 낡은 기억이 함께 존재한다.
카페 한편에는 녹슨 철문이 남아 있고,
건물 외벽에는 오래된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다.
이 낡음이 오히려 성수동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멜로가 체질' 속 주인공들도
그 낡음 속에서 살아가며 웃고 울었다.
그리고 지금 성수동을 걷는 사람들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단한 하루를 품고 있는 여행자다.

 

 

커피 향과 마음의 온도, 성수에서 천천히 하루를 채우다

성수동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을 봐야지’보다 ‘어디서 쉬어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도 늘 그랬다.
바쁘게 걷거나 뭔가를 완벽하게 하지 않으려 애쓰지 않았다.
조용한 골목 어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며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런 장면들이 오히려 더 위로가 되었다.

실제로 성수동에서는
하루 종일 골목을 걷고, 카페에 앉아 있고,
스튜디오 겸 갤러리를 들르다가,
혼자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그런 하루가 성수동에서는 가장 자연스럽다.

작은 디자인 상점이나 북카페에 들르면
드라마 속 진주처럼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는 기분이 든다.
‘괜찮아, 이대로도 충분해’라는
드라마의 메시지를 조용히 반복하는 것처럼.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강요하지 않는 동네다.
성수동은 여행자에게 목적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방향을 가볍게 잡아줄 뿐이다.
그 점이야말로
'멜로가 체질'과 이 동네가 완벽히 닮은 이유다.

'멜로가 체질'주인공들에게 쉼을 주는 카페

 

드라마보다 더 조용히, 성수동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멜로가 체질'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였다.
감정의 결이 조용히 흔들리고,
사소한 대사 한 줄이 하루를 지탱하게 만드는 작품.
그 배경이 성수동이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성수동을 걷는다면,
그 시절 드라마 속 인물들이 느꼈던
고단함, 위로, 어설픈 행복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거리 위에서 다시 피어난다.
낯선 듯 익숙한 거리,
기억도 아닌데 그립게 느껴지는 풍경,
그 모든 것이 지금 성수동 안에 있다.

여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혼자 걸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저 그 공간의 공기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도시 속 작은 틈을 찾는다.
감정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드라마보다 더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무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성수동은 그런 여행지다.
'멜로가 체질'이 남긴 감정이 아직도 흐르는,
서울의 또 다른 진심이다.